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정상적으로 선출되었으면 넉넉하게 인수위원회에서 공약의 현실성을 검토하고 취임식에 초대할 명단도 꼼꼼히 따져보았겠지만, 궐위선거로 선출된 19대 대통령은 그럴 새도 없이 즉시 업무에 들어갔다. 이러니 취임 축하 와인 선정에 신경이나 쓸 리 만무할 듯해 이 자리에서나마 새 대통령에게 와인 한잔을 건네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 취임식이나 국가 간 정상회담의 만찬 자리에는 와인이 등장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 만찬에서 20달러 내외의 저렴한 캘리포니아 와인을 선보이며 아메리카 퍼스트를 웅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취임 만찬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와인이 등장했고, 북한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보르도 일등급 샤토 라투르를 대접함으로써 우리 대통령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표시했다. 탄핵의 여운 속에서 여전히 극도로 분열된 민심을 추슬러야 할 새 대통령에게는 어떤 와인이 어울릴까?

와인의 종주국은 누가 뭐래도 구대륙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이다. 유럽 와인은 아무래도 오랜 전통으로 인해 신대륙의 와인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오라를 갖고 있다. 그런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막상 그렇지도 않다. 유럽 와인의 역사에는 포도나무뿌리혹벌레로 불리는 `필록세라(phylloxera)`가 등장한다. 노란색의 이 벌레는 이름 그대로 나무 뿌리에 달라붙어 갈아먹으면서 혹을 만들고, 결국에는 포도나무를 말라죽게 한다. 치명적인 이 진딧물이 1860년대 전 유럽에 퍼지게 되고 속수무책으로 대부분의 포도밭은 황폐화돼 갔다.

저항력이 강해 쉽게 죽지도 않는 이 해충 때문에 오죽하면 와인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 속에 미국산 포도나무의 뿌리에 유럽 품종 가지를 접목하면 필록세라에 살아남는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비교조차 하고 싶지 않은 저급한 미국산 포도나무를 자신들의 고귀한 포도나무에 접목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을 유럽 와인 생산자들의 반발도 상당했으나, 결국 미국 포도나무의 도움으로 유럽 포도밭은 다시 살아나게 됐다. 그러니까 지금 많은 유럽 와인들이 전통과 정통이라는 위세를 떨고 있지만 실제로 유럽 포도 품종은 미국산과의 결합에서 이뤄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와인은 순수하게 자신만의 품종만으로 생산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1600년대 유럽에서 건너와 미국 동부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초기에는 북미의 토착 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었으나, 이 와인은 격한 냄새 때문에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도 역시 토착 품종에 유럽 품종을 접목하거나 유럽산 품종을 직접 가져와 와인을 생산한 후에야 제대로 된 와인이 나오게 됐다. 지금이야 구대륙과 신대륙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토양과 기후의 특징을 빌려 와인의 개성을 운운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미 몇 백 년 전에 이들의 포도는 접목을 통해 서로 섞이고 보완하면서 발전을 거듭해온 것이다.

닫혀 있는 순수성은 해충에 취약하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갈 때, 이 땅에 살고 있는 생각이 다른 많은 이들을 함께 품고 가지 않는다면 벌레에 쉽게 감염됐던 유럽의 고대 품종처럼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 대통령에게는 미국산 진판델 와인을 추천한다. 진판델 품종은 유독 필록세라에 높은 저항력을 갖고 있다. 또한 미국 내 와인 중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품종이기도 하며, 고가의 희귀 와인을 만드는 다른 품종에 비해 진판델 와인은 가격도 대부분 저렴하고 대중적이라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와인보다 강한 단맛에 취해 자꾸 마시다 보면 와인치고는 높은 알코올도수로 인해 본인의 평소 주량을 넘어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초심을 잃었던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새 대통령은 부디 와인 한잔의 달콤함만을 잠시 즐기면서 화합과 보완의 정신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장지호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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