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다. 황사 때문에 눈이 침침해져도 봄은 봄이다. 미세먼지로 인해 코가 간질간질하더라도 봄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새로운 희망과 변화를 꿈꾸게 한다. 최승자 시인도 우리에게 이런 봄의 희망을 넌지시 건넨다. "살다 보면 때로는 봄이 오겠지/ 때로는 낯선 대양 하나 새로 생기겠지/ 질펀한 절망 속에서도/ 오렌지 같은 희망은 있겠지/ 불러도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을 때/ 그래도 살다보면 때로는 봄이 오겠지/ 어디서 낯선 대양 하나 새로 생기겠지."(`살다보면`, 전문)

계절마다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는 재미는 남다르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청량한 소비뇽 블랑 품종의 화이트와인이 제격이고, 낙엽 지는 가을 저녁에는 시라 또는 바롤로 와인을 곁들이면 그 계절의 쓸쓸함을 더해주는 풍취가 제법일 것이다. 눈발이 날리는 거리를 보면서 마시는 한겨울의 보르도 와인은 계절별 맞춤형 와인의 정수를 만끽하게 한다. 그렇다면 변덕스러운 봄에 어울리는 와인은 무엇일까? 역시 피노누아 와인이 망설임 없이 떠오른다.

피노누아로 와인을 만드는 작업은 다른 그 어떤 품종보다도 어렵다. 토양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때문에 재배되는 지역이 극히 제한적이다. 껍질이 얇아 각종 질병에도 쉽게 감염되고 해충에도 저항력이 약하다. 기온에 민감해서 조금만 더워지면 피노누아 특유의 화사한 향은 기대할 수 없다. 태생부터가 연약한 피노누아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다른 품종보다 낮아 생산량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어디서 자라고, 어떻게 재배되고, 누가 양조했는지에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피노누아는 토양의 숙명과 날씨의 행운과 생산자의 노력이 모두 갖춰줘야만 제대로 된 와인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러니 좋다는 피노누아 와인은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한마디로 도도하고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품종이니 변덕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봄과는 천생연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재배하기도 어렵고, 가성비도 낮은 피노누아 와인에 애호가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우선 피노누아 품종 자체의 매력 때문이다. 피노누아의 빛깔은 옅고, 타닌은 적고 입안에서의 질감은 가볍다. 갓 양조된 피노누아 와인에서는 고혹적인 향수 내음과 장미, 산딸기 향이 느껴지고, 잘 익게 되면 훈연과 흙냄새가 풍긴다. 그러기에 흔히들 피노누아는 섬세함과 우아함으로 마신다고 한다.

오로지 피노누아 와인만 평가하는 세계적인 와인평론가 앨런 메도스는 피노누아를 "무게 없는 힘(power without weight)"으로 일컬었는데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피노누아 와인이 차별화되는 또 다른 이유는 특정 생산 지역의 오라(aura)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호주와 뉴질랜드의 일부 지역에서도 품질 좋은 피노누아 와인이 양조되지만, 오로지 피노누아 와인만 양조하는 프랑스 부르고뉴만큼의 각별한 대우는 받지 못한다. 부르고뉴 지역의 `황금의 언덕`이라 불리는 코트도르에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대의 와인을 생산하는 그랑크뤼급 포도밭이 32곳이며, 역시 만만치 않은 희소성과 가격의 프르미에급 포도원만도 500곳이 넘으니 웬만한 애호가 아니고서는 어디에 무슨 와인너리가 붙어 있는지 헷갈리기 일쑤이다. 프랑스 상속법에 따라 세대가 내려갈수록 와이너리가 계속해서 분할돼 적은 생산량의 와인들은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그런데도 참으로 놀라운 점은 그렇게 작게 쪼개진 포도밭 단위로도 와인의 향과 맛과 개성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이런 유일무이함이 부르고뉴 피노누아만의 매력이다. 게다가 피노누아 품종 자체의 섬세함 때문에 빈티지 영향을 지대하게 받으므로 매년 부르고뉴 와인을 기다리는 설렘은 마치 한 해의 계절을 시작하는 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과도 같다. 굳이 구하기도 어려운 값비싼 등급의 와인을 찾을 필요 없이 소박한 마을 등급 와인을 마시면서 찰나같이 지나가는 이 아름다운 봄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네 인생은 값지다. La vie est belle!(인생은 아름답다)

[장지호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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