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출퇴근하다 보니 자리 다툼하는 노인들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미처 내리기도 전에 밀치고 들어오는 그들을 몇 번 겪다 보면 한편으로는 얼마나 몸이 힘들면 저럴까 싶어 안쓰럽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기초적인 질서조차도 무시하는 나이 듦의 뻔뻔함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회사 상사의 꼰대질도 권력이 있어야 가능하고, 백화점 고객의 갑질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니, 그나마 나이로 위세를 누리는 유일한 공간이 지하철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서글퍼질 따름이다.

잘 늙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노년의 비루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가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다. 로스는 모든 작품에 걸쳐 일관되게 인생의 불가해성인 늙음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데, 그의 소설 중에 백미가 `에브리맨`이다. 이 소설에서 로스는 노년을 `대학살`에 비유하며 주인공의 무너지는 육신과 황폐화되는 영혼을 차갑게 비추고 있다. 노년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고작 젊은 시절의 좋았던 시간들을 갈망하는 것뿐이라는, 지독하게 냉혹한 결론을 내리면서 작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생의 허망함 앞에서 겸허해지기를 넌지시 일러준다. 하지만 어찌 삶이 속수무책으로 무력하게만 흘러가겠는가. 비록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잃어가는 것들이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생의 마무리를 고귀하게 완성하고자 애쓰는 이들이 적지 않다.

흔히 와인은 인생에 비유된다. 늙어가는 인생처럼 와인도 숙성이 진행된다. 말년의 품격이 주변 환경에 좌우되듯이 와인의 잠재력을 결정하는 것은 빈티지다. 와인의 빈티지는 생산된 와인에 사용된 포도가 재배된 연도를 말한다. 열악한 빈티지의 와인은 하나같이 결함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래 두고 마실 수 없다. 일조량이 부족한 해의 포도는 설익은 풀냄새가 진동하는 와인이 되고, 필요 이상의 햇빛을 받은 포도는 알코올 함량이 높거나 당도가 과도한 와인을 만든다. 많은 강수량은 와인을 묽게 하고, 혹한이나 가뭄은 포도의 수확량을 감소시켜 와인의 생산량을 줄게 한다.

반면 좋은 빈티지의 와인은 그해의 포도가 건강하게 잘 자라난 결과다. 좋은 해의 포도는 추운 겨울을 견디고 따뜻한 봄과 덥고 건조한 여름을 거치면서 맑고 포근한 가을에 수확된다. 이런 포도로 만든 와인은 오랫동안 숙성이 가능하다. 혀를 아리게 만들 정도로 강했던 타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 바닥으로 침전돼 쓴맛, 단맛, 신맛이 어우러져 균형을 이룬다. 서서히 진행되는 산화를 통해 검붉기만 한 빛깔은 우아한 벽돌색으로 변모되고, 돌출된 과실 향은 고소한 견과류의 향에 버무려진다.

1982년도의 보르도 와인이나 1985년도의 론 와인은 30년이 지난 지금 마셔도 풍부한 향과 인상적인 맛 덕택에 좋은 빈티지로 대표된다. 아쉽게도 마셔본 적은 없지만 1959년산 부르고뉴 와인이나 1945년산 보르도 와인은 아직까지도 와인 본연의 매력을 간직한다고 하니 시간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좋은 빈티지 와인의 고고함을 상상케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빈티지일지라도 모든 와인이 숙성만 시키면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 케빈 즈랠리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와인 중 90%는 1년 안에 마시는 것이 좋고, 9%는 5년을 넘기면 안된다고 한다. 고작 1%의 와인, 그것도 좋은 빈티지에 생산된 와인만이 5년 이상의 숙성으로 와인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한다. 품격 높게 나이 드는 인생이 어려운 만큼이나 잘 익어가는 와인이 드문가 보다. 더군다나 오래된 와인의 경우 유통과 보관에 있어서도 그만큼의 각별한 주위를 기해야 하니 최상의 상태로 오래된 와인을 만나기란 그야말로 큰 행운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와인을 마시다 보면 한번쯤은 제대로 숙성된 좋은 빈티지의 와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다만 그 순간에 좋은 빈티지 와인에 걸맞게 함께 마시는 우리의 노년이 허명과 허영에 들떠 있는 거짓 인생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굳이 오래된 와인에 연연할 게 아니라 풋풋한 와인이라도 흥겹게 마시는 편이 나을 성싶다.

[장지호 한국외국어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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