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뮌헨의 디자인뮤지엄에 간 적이 있다. 뮌헨에 머무는 동안 독일의 강박에 가깝게 느껴지는 정리정돈과 기계적인 정확함에 치를 떨고 있을 때였다. 거리에 붙은 벽보 하나도 오와 열이 딱 맞고, 주차돼 있는 차들의 간격이 기가 막히게 일정한 걸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디자인뮤지엄에서 그런 독일인들이 엄선한 제품들을 봤다. 그것들은 과연 뮤지엄에 모셔질 만한 `작품`들이었다.

산업혁명과 대량생산의 시대를 거치면서 제품은 최대한 빨리 다음 제품으로 대체·소비돼야 했다. 디자인은 금방 휘발되는 감각으로 적당히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금세 질리게 만들어져 왔다. 하지만 디자인뮤지엄에 있는 제품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수십 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뚫고 나와 그 자리에 선 사람들을 압도했고 경탄케 했다. 강렬한 소유욕을 자극했다. 제품이 제품으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감상하고 소장하고 싶어하게 했다. 소비하는 제품이 아닌 향유하는 작품으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뮤지엄에서 자랑스럽게 전시할 만큼 충분히 만들어온 그 역사가 꽤나 부러워서 온종일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최근 LG의 가전제품 `LG 시그니처(SIGNATURE)`는 제품이 아닌 작품이 되겠다는 담대한 선언을 내걸었다. `가전, 작품이 되다`라는 문구가 귀에 걸린다. TV, 냉장고, 세탁기, 공기청정기의 4가지 제품군으로 소개되는 LG 시그니처는 뛰어난 기능과 디자인으로 직접 본 이들의 소유욕과 향유욕을 자극한다. 광고 역시 제품을 따라 스스로 작품이 되려 한다. 특히 각종 아트의 장르를 빌려 제품을 그 아트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광고들이 응당 떠드는 제품의 성능에 대한 설명은 잊은 채 제품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여 감상하게 하는 데 집중한다.

먼저 사진작품집이라는 장르를 빌렸다. 빛, 달, 별, 비라는 제품의 디자인 모티브를 주제로 자연 속에서 빛과 어우러진 TV, 달과 함께하는 세탁기, 별이 있는 밤의 냉장고, 비가 내린 후 풍경 속 공기청정기가 사진집처럼 한장 한장 넘어간다. 미니멀한 제품 디자인은 정적인 대자연의 풍광 속에 어우러져 근사한 사진 작품이 됐다. 역시나 제품의 성능은 얘기하지 않는다. 이미 일상 속에서 친숙한 TV, 냉장고, 세탁기, 공기청정기라는 생활가전들을 작품의 경지로 격상시키기 위해 대자연의 모티브에서 온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전달하는 데만 온 힘을 기울인다.

초현실주의 아트라는 장르를 빌리기도 했다. 대자연을 바라보며 신들과 요정을 봤던 옛 그리스인의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낸다. 일출과 일몰 사이 아폴로의 마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거친 파도 속에서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보던 그리스인들은 모든 자연을 신과 요정들로 형상화했다. 광고 역시 제품의 디자인 모티브가 된 자연을 뮤즈로 표현한다. 별의 뮤즈는 공중그네에 매달려 아름다운 별들을 흩날리고 냉장고에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달의 뮤즈는 신비한 빙하 위에 서서 고요한 밤의 보름달을 굴려 세탁기의 형상을 만든다. 비의 뮤즈는 마치 무지개처럼 서 있는 비 내리는 우산 위를 걸어 공기를 씻는 공기청정기를 불러낸다. 빛의 뮤즈는 구름 너머 태양을 찾는 듯 하늘로 나 있는 길을 올라가 빛나는 TV를 신전의 벽까지 안내한다. 이 광고 역시 초현실의 영상미로 제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만 철저히 집중하고 있다.

고가의 제품일수록 그리고 잘 아는 명품일수록 기능적 품질에 대한 설명은 감추고 감성품질과 매력품질을 전달하려는 접근을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라고 한다.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은 여행가, 항해가, 비행기 조종사 등을 통해 여행의 로망을 말할 뿐, 가방이 얼마나 튼튼한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잘 담아내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 별을 향해 비행하고 바다 너머로 항해하며 대륙 저편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커피브랜드 라바차(LAVAZZA)는 1993년부터 매년 세계적인 사진작가와 협업한 아트캘린더를 발행해왔다. 20년이 넘은 이 캠페인은 해마다 주제를 달리하며 문학작품, 러브스토리, SF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라바차의 커피 잔과 어우러진 아트캘린더를 제작하고 있다. 라바차 커피의 향과 맛을 문화적 향과 맛으로 기억하게 하고 광고와 제품 모두 향유하고 싶은 작품이 되게 하려 하고 있다.

1916년 프랑스의 예술가 마르셀 뒤샹은 도기공장에서 제작된 변기를 뒤집어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뉴욕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산업제품을 예술작품으로 둔갑시킨 그의 시도에 수많은 비난이 따랐다. 실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이 감상 대상인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제품은 실용만이 목적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감상할 만한 것이 돼야 한다. 우리의 생활공간은 수많은 제품들로 채워져 있고, 그것들이 단순히 실용과 기능의 이유로만 자리 잡는다면 우리의 공간에선 오직 삭막함만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뮤지엄에도 제품이 아닌 작품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기를, 광고 역시 작품으로 기억되기를 고대해본다.

[김진원 HS애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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